시인은 행복하다고 하는데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독재정권...
시대의 희생양이 된 그의 삶에 슬픔을 넘어 분노가 인다..ㅡ,ㅡ
요즘 너무 욱한다....
주님...제 마음이 너무 강팍합니다
성령의 손길로 사랑으로 가라 앉혀 주셔요
아멘!!
행복 천상병 詩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遺稿詩集 『나 하늘로 돌아가네』(청산, 1993)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의 <행복>을 난도질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아내의 벌이로 연명하는 지지리도 못난 남자.
요즘 세상 대학 나온 게 대수일 것도 없고 언제부터 시인이 그렇게 명예로운 직업이던가.
좋아하는 음식이 막걸리 정도라면 안분지족이 틀림없겠으나 이만한 협량한 행복을 부러워할 이가 얼마나 될까.
의정부에 마련된 구옥이나마 행려병자 경력의 소유자에겐 과분한 대궐이다.
마흔둘 늦장가 들어 감지덕지이긴 한데 요모조모 마누라 말고 다른 여자 넘볼 능력이나 되는 남자인가.
하느님을 강력한 빽으로 둔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솔직히 그것만으로 생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억울하게 붙들려가서 성기에 전기고문을 받아 아이 생산이 불가능한 대목은 지극히 통탄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유럽에 유학했던 친구로부터 술 한 잔 얻어먹고 막걸리 값을 받은 게 빌미가 되어 1967년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무시무시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때의 전기고문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6개월 만에 선고유예로 풀려난 뒤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다가 청량리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행방불명된 그를 사망했다고 여긴 문우들이 그의 유고시집을 냈다.
뒤늦게 살아있다는 게 확인되어 문우들이 시집을 들고 찾아갔을 때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모든 걸 체념하고 초월한 듯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며 말하는 특유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의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과도한 음주 탓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실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천 원 짜리 한 장을 손에 쥐고 천하를 얻은 양 활짝 웃는 사진 등 우리가 이미지로 기억하는 시인의 모습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이후의 것이다.
이 시도 여생을 막걸리에 취해 허우적거리면서 소풍하다가 귀천하기 몇 해 전에 쓴 작품이다.
좋아하는 막걸리를 아내가 다 사주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른 것이,
그에게 막걸리 값으로 오백 원, 천 원씩 적선해준 문인 친구 후배가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막걸리 값 한 닢 줘보지 못한 지인은 내심 불쾌한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나한텐 왜 돈 달라는 얘길 못하지?’
왜냐하면 그 순진무구한 천상병 시인도 거북하게 느껴지는 친구거나
괜히 말했다가 거절당할 것 같은 고약한 사람에겐 아예 말을 끄집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이 시대 마지막 순수시인이란 수식을 붙인다.
그의 시와 이력, 그의 기행과 생긴 모습 등이 모두 그러한 칭호를 쌓아올린 조적물이다.
어떤 시들은 너무 단순 소박해서 겉으로 드러난 그 천진성에 기가 막혀
현학적인 비평가들은 모욕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시는 고급 예술이고 매우 진지한 것인데 "이런 시는 유치원에서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이해한다면 함부로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동시대의 시인 가운데 가장 '정직한 시인'이며 그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위선과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그는 분명 지진아로 살았으며,
하루 용돈 2천원이면 마냥 행복했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비린내와 구린내를 풍기며 정직과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보다야
하나님 빽을 둘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 권 순 진 -
...천상병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했다.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 근무하였으며,
19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였다.
<문예>지 평론 "나는 겁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전재함으로써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52년 시 '갈매기'를 <문예>지에 게재한 후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을 수료하였으며,
1956년 <현대문학>지에 집필을 시작으로 외국서적을 다수 번역한 바 있다.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 간 재직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다.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 병원에 입원
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유고시집 <새>(조광)가 발간되었으며, 이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에 유고시집이 발간된 특이한 시인이 되었다.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결혼한 후,
1979년에 시집 <주막에서>(민음사),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사)를,
1985년에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을,
1987년에 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일선)을 출간했다.
1988년 간경화증으로 춘천 의료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도중,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통고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
1989년 시집 <귀천>(살림), 공동시집 <도적놈 셋이서>(안의),
1990년 수필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강천),
1991년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놈>(답게),
1993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을 간행하였다.
1993년 4월 28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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