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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영화 '생일' '한강에게'

♡풀잎사랑♡ 2019. 4. 20. 10:22

살아남은 자의 슬픔…영화 '생일'

 

 

 

 

 

 

 


▲ 영화 '생일'

"저희 아이 사진 돌려주세요…. 소풍 오셨어요?"

영화 '생일'(이종언 감독, 4월 3일 개봉)의 순남(전도연)은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쏘아붙인다. 아이들이 생전 찍은 사진을 보며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먹던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는다.

영화 '생일'의 순남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 수호(윤찬영)를 잃은 뒤 가슴속에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아들의 생일날 다함께 모여 추억하는 시간을 갖자는 유가족 모임 관계자들의 제안을 연거푸 거절한다. 이런 비극에 생일파티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사업하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온 남편 정일(설경구)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며 꿋꿋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아들이 없는 상실감에 몸서리친다. 현관 센서등에 불이 들어오자 깜짝 놀라 아파트가 떠나가라 목놓아 운다.


▲ 영화 '생일'

영화는 순남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혼자만 힘드냐고 손가락질하는 주위 사람들, 보상금 얼마 받았냐고 묻는 친척 사이에서 아무도 믿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또 그녀를 위로하는 존재도 결국 사람들이다. 그녀가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아둔 응어리는 아들을 기억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한 생일파티에서 결국 분출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티슈관람'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들다.

산속에서 낙마사고로 딸을 잃은 작가 마사 히크먼은 1994년 자신이 상실의 고통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를 '상실 그리고 치유'라는 책으로 펴내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는데 그녀는 책에 이렇게 썼다. "슬픔의 계곡에서 벗어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수많은 걸림돌과 곁길이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잘하고 있고 거센 폭풍과 걸림돌은 모두 그 과정의 일부다. 그러니 모든 걸 예상하고, 그것들이 올 때 받아들이고, 숨을 크게 한번 쉬고 계속 가는 거다."


▲ 영화 '생일'

고통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없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사람들도 있고 남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다.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지만 이를 돕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역할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리치료를 담당해온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모든 슬픔과 고통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이어서 등급이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서 누구의 아픔 때문에 내 아픔이 홀대되어서도 안 되고 또 내 아픔만큼 타인의 고통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유가족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사람들이 느낀 슬픔과 고통도 치유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생일'과 '한강에게'는 '치유 영화'로서 존재 가치가 있다(영화 '한강에게'는 세월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영화 앞부분에 세월호 유가족이 쓴 수기를 낭독하는 장면을 삽입하며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치유는 상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장자크 발레 감독의 미국 영화 '데몰리션'(2015)에서 주인공은 아내를 잃은 뒤 상실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분해한다. 급기야 그는 냉장고와 집까지 완전히 뜯어놓은 뒤 자신에게 죽은 아내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한다.

영화 '생일'에서 주목할 장면은 마지막 생일파티 시퀀스다. 유가족과 아들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죽은 수호를 추억하는 자리에 순남도 마음을 돌려 참석한다. 이들은 수호와의 추억을 이야기함으로써 상실감을 공유한다. 이 순간 순남은 자신의 아들을 더 많이 알게 됐을 것이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슬픔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을 것이다.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 자신이 미워졌다"고 썼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미 죽은 자의 친구이거나 죽을 이의 유가족이다. 이들을 기억하면서 또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상실감을 줄이는 방법이다.

세월호, 천안함, 4·3사건 등 4월은 유독 억울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많은 달이다. 상실의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져야 비로소 온전한 치유가 시작될 텐데 공교롭게도 이 사건들의 원인 규명은 여전히 미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죽음을 정권과 이념의 잣대로 나눠 재단하는 것이 더 깊은 상처를 남겨 치유를 힘들게 한다.

아일랜드 작가 프랭크 오코너는 "상실감에 슬퍼하는 사람들보다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딱하다"고 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 슬픔을 모르는 자의 무례함이 목소리를 드높이던 때가 불과 몇 해 전이다. 슬픔을 모르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티슈를 들고 극장에 갈 필요가 있겠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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