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리고 사람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풀잎사랑♡ 2019. 3. 26. 23:03



326...

오늘은 1827년 악성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기도 하다

순국 109주기...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국권이 회복된 조국에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은 안타깝게도

109년이 지나도록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008년 뤼순감옥 뒷편 일대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그렇게 11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

광복... 독립한 조국에서 편히 살면서 이렇게 기념일에만 마음을...죄송하고 부끄러운 시간이다...ㅡ,ㅡ









3·1운동 전사(前史)는 안중근을 빼고 말할 수 없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는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과 탄생 140주년이다.


새로 발견된 안중근의 최후 기사…‘고국 반장(返葬)’의 恨

1910년 3월 10일 안 의사가 남긴 최후의 유언 중 “하얼빈에 묻었다가 고국 독립 후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는 것)해 달라”는 유지는 아직 우리 후손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 찾기에 몰두해온 중국 하얼빈이공대 김월배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東京) 국회도서관 신문자료실에서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과 매장지를 보도하는 새로운 신문 기사를 발굴해 이 중 3건을 문화일보에 전해왔다. 일본 기자가 썼지만, 그 문맥에서 기자와 사형 집행자들의 존경과 숙연함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  

먼저 안 의사 순국 다음 날인 1910년 3월 27일 도쿄 아사히신문은 전날 ‘뤼순 특파원 발(發)’ 기사에서 사형 집행과 매장 상황을 전했다. 기자는 “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이르자 간수에게 이끌려 형장에 들어온 그(안중근)는 고향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특별히 수의로 지어 보내준 새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안색이 약간 창백했으나 각오에 찬 모습으로 보였다”며 마지막까지 당당한 안 의사의 모습을 전했다. 또 “교도소장은 피고에게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유언이 있는지를 물었다. 안중근은 특별히 남길 말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청한다면 동양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달라고 하고 그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유해는 오후 1시에 공동묘지에 정중히 매장됐다. 안중근의 동생 2명 등이 교도소장에게 면회를 요청해 사체 인도를 청원했으나 결국 허가되지 않아 초연히 자리를 떴다”고 전하고 있다. 공동묘지는 뤼순 감옥서 묘지를 말한다. 

같은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안(安)의 최후’라고 제목을 단 ‘뤼순 래전(來電)’ 기사에서 비슷한 사형 집행 상황을 전하면서 안 의사가 “교수대 위에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고 싶다”고 희망했다고 전했다. 만세를 외쳤다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미뤄 교도소장이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는 “사형이 집행된 후 안중근의 유해는 특별히 침관(寢棺)에 안치돼 정중히 대우를 받으며 감옥묘지에 매장됐다”고 전했다.

새로 발견된 신문기사 중에서 대만일일신문(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을 선전했던 기관지) 3월 30일 자는 “안중근 매장지”라는 제목을 달아 관심을 모았으나 기사에 매장지가 특정돼 있진 않았다. 당시 안중근 매장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기사는 “안중근의 사형 집행일로 결정된 2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한국 건원절(乾元節·순종 탄신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통감부의 연기 요청을 받아들여 26일로 변경됐다”고 이미 알려진 내용을 확인했다. 이어 “유해매장지로 안중근은 하얼빈을 희망하고 어머니는 고향 신천(新川, 황해도)을 주장했으나(…) 결국 뤼순에 매장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안 의사와 안 의사 모친의 희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불법 재판에 의한 사형 집행도 모자라 저들의 국내법까지 어겨가며 안 의사의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는 비인도적 만행을 저질렀다. 안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고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올 것을 우려한 것이다. 묻힌 곳이 뤼순 감옥서 묘지로만 알려졌으나 일제 때는 유족조차 참배할 수 없었고, 해방 이후에는 소련군의 점령-중국 공산화-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굴곡 탓에 안 의사 유해 찾기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유해 발굴에 남북이 각각 나서기도 하고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정부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북한과 공동사업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제안해놓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맞닿아 있는 동양평화론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안중근의 국권회복 운동은 군주주권의 전제주의 청산과 국민주권의 공화주의 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구체화됐다”고 말한다. 안중근의 정치사상은 군주정을 비판하고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했다. 안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동양평화론’은 11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그는 이토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니, 그를 포살한 것도 사적 원한에서가 아니라 그런 목적이었다”고 했으며, 한국과 일본, 청나라가 뤼순에 동양평화회를 조직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학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대 구미의 어느 지식인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유럽연합(EU) 구상보다 반세기나 앞서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중국학자 예텐니(葉天倪)는 저서 ‘안중근전(傳)’에서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에 유린되는 평화를 지키려던 평화주의자이며 세계평화를 위해 자기 몸을 바친 ‘세계위인(世界偉人)’이라 예찬했다. 동양평화론은 이후 3·1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하는 인류 평등과 평화 등 민족주의의 틀을 넘어선 문명성으로 이어졌다. 


 

안중근에 의해 저격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일까?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 같은 공로로 이토는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당시 일본 정계에서 천황 다음 가는 실력자로 불렸다. 그런 이토를 한국의 30세 의병이 단독거사로 백주에 저격해 사망케 했으니 사건치고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19091026) 사건 당일부터 114일까지 이와 관련된 전보가 9만여 통에 달했다는 점이 그 충격의 강도를 짐작케 한다."

안중근이 밝힌 이토 히로부미 죄상은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 철도, 광산, 산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민족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등 무려 15가지에 달합니다.


재판 과정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사 이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마친 후 중국 뤼순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일본의 각본에 따라 진행된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191027일부터 총 6회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3차 공판에서 밝힌 거사 결행 이유입니다.

"나는 헛되이 살인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번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나는 삼 년간 도처에서 유세도 하고 또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 참가했다.

이번 거사도 한국 독립전쟁의 하나로 나는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결행한 것이지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나는 피고인이 아니라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 독립이 어찌 안중근 혼자만의 일이리오! 그의 공판이 진행된 법정을 지켜본 한 외국기자는 당시 안중근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안중근은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하면서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혹시라도 이 법정이 오히려 자기를 무죄방면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한 모습으로 법정을 떠났다."

이처럼 의연했던 안중근 의사에게도 가족은 연민이었나 봅니다.

안중근은 형 집행을 기다리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모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안중근의 효와 어머니의 서릿발 기상이 담긴 편지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나이다."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 여사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 등에서 보인 어머니의 의견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일제 법정에서의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입니다. 다음은 <안중근사람들>에 수록된 조성녀 여사의 편지 전문입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인터넷 기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