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위대한 작가로만 알고 있던 박경리 선생
따님의 목소리로 그분의 인생을 생각해 본다
운명하기 몇 달 전 하셨던 말씀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나이들어 나도 이런 생각을 할까? 마음이 아프다
어제 아침 와와한테서 박경리 선생과 박완서 작가의
책 두권을 선물로 보냈다는 톡을 받았다
아...오늘 배송될 확률 5%이내...
월요일에나 올텐데 이틀을 언제 기다리나
하루가 여삼추 같을 것 같다
와와...내 보물 잘 읽을께...
TOUR STORY 문화와 사람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8. 6 vol. 493
「소설 토지는 어머니의 눈물로 점철된 발자국입니다」
아주 오래 전, 소설 ‘토지’를 읽고 나서 글의 씨줄과 날줄에 대해 생각했다.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된 최참판댁 가족사와 얽혀 들어가는 소설의 줄거리를 떠올리면서
‘작가는 글의 얼개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토지의 무대와 규모, 탄탄한 짜임새에 감동했던 소싯적 이야기다.
하지만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5월 5일, 박경리 선생의 10주기’라는 단신은
소멸돼 가던 그 기억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다.
고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과 인터뷰를 약속한 날,
하늘은 꾸물거렸다. 궂은 날씨야 어찌 됐건
새벽 댓 바람부터 서둘러 약속한 시간보다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따님을 징검다리 삼아
문호(文豪)의 생각과 속내를 들춰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write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photograph 박은경
최참판댁 Ⓒ 문유선
올해가 박경리 선생의 10주기였습니다. 원주와 어떤 연고가 있기에 박경리 선생께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까?
남편 김지하 시인이 원주에 연고가 있어요. 제가 결혼해서 원주로 남편을 따라 내려왔지요.
김지하 시인이 감옥에서 출소한 후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이곳으로 내려온 다음, 어머니께서 저하고 손자를 돌보려고 함께 오시게 된 거지요.
올해 10주기를 맞아서 특별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원주에서는 5월 12일 동상 제막식을 했어요. 5월 4일에 하동에서 10주년 기념행사를 했고, 기일인 5월 5일에는 통영에서 시비 제막식을 했지요.
6월 말에는 일본에서 토지 3, 4권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올 생각이에요. 재일교포들이 2, 3세들에게 읽히고 싶다고 해서 번역을 하게 됐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청소년 토지’가 많이 팔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우리를 핍박했던 일본인들도 토지를 읽는다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어머니께서는 일본 지도자들이 전쟁을 일으켰을 뿐, 일본 국민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처럼 이분법적으로
‘일본인들은 모두 나쁘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읽었던 토지 4, 5권은 간도에서 평사리로 돌아오는 서희네 이야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 부분은 원주에서 집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주라는 지역이 이 시기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글 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원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독하게 지내셨어요.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찾아오는 이들도 없었어요. 작품을 쓸 때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셨거든요. 낯선 곳에 와서 심신이 편치 않으셨겠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정도 들고 그런 것 같아요.
하동 평사리문학관은 지자체가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주와 하동 양쪽에 다 관여하고 계십니까?
네, 그런 셈이지요. 애초에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을 만드신 분은 의미를 부여해서 잘 하시려고 했는데, 그 뜻이 후임자들에게 온전히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콘텐츠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어요. 윤상기 군수가 취임하자마자 저를 찾아와 ‘잘할 테니 도와달라’고 해서
다시 콘텐츠를 사용하게 하고, 도와주고 있지요. 제가 토지 관련 시설들에 원하는 것은 다른 건 없고, 다만 사심 없이 잘 운영해달라는 거예요.
애초에 김 이사장을 만나러 온 목적을 달성할 차례다. 김 이사장이 어머니 박경리 선생에게 얼마나 가까이 접근해서 작업을 관찰했을지 궁금했다.
토지는 다양한 공간적 무대와 수많은 인물의 복잡한 캐릭터가 뒤얽힌 작품입니다.
박경리 선생 생전에 이 같은 조합을 엮어내는 방식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나요?
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어머니 작품을 다 읽었어요. 연재한 것이든, 출판한 것이든 모두 읽었어요. 어머니의 집필은 복잡한 노동이었어요.
연재 횟수가 넘어갈 때마다 수도 없이 고쳐 쓰셨지요. 한 장을 탈고하기 위해서 열 장을 고쳐 쓰실 정도였어요.
당신께서는 글의 줄거리가 머릿속에 얽혀 있는 것 같았나 봐요. 그래서 저더러 항상 ‘읽어봐라. 문제가 없느냐?’고 물어보셨어요.
어머니는 책이 나오고 읽어 보신 후에 항상 ‘내가 쓴 것 같지 않다’고 하셨어요.
토지가 극한 작업의 극한 인식, 그 경계를 뛰어넘은 작품이어서 그랬나 봐요. 어머니는 재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작품에 쏟아 부으셨어요.
어머니의 철저함에 제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머니께서는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소설만 좋아했던 것 같아요. 토지 집필 초기에는 등장인물에 관한 도표를 작성해 놓으셨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리더군요.
한 번은 연재 중에 인물에 착오가 생겼던 적이 있었어요. 어머니께서는 ‘내 성실성에 문제가 있다’며 연재를 중단하시더군요.
어머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해서 스스로 잘못을 용서하지 못했어요.
토지는 다른 작가들의 대하소설에 비해 캐릭터 묘사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데다, 짜임새가 탄탄한 것이 특징입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글의 프레임을 설계하시는 작업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나요?
혼자서 궁리를 하고 구상하시니 저로서는 알 수 없었지요. 다만 고민을 많이 하시기는 했어요.
그러다 안 되면 밭일을 하시고, 밭일을 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손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와 글을 쓰셨어요.
박경리 선생에 견줄 수는 없지만 글을 써서 밥을 먹는 동업자로서 선생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좋은 문구나 표현이 생각이 나면 휴대폰에 녹음을 하는 내 처지도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김 이사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께서는 작품 속 등장인물 중 악인에 대한 애정도 깊으셨다는 것이에요.
어머니께서는 등장인물들이 나쁜 일을 당할 때 가슴 아파하셨지요. 저는 어머니가 만들어 낸 악인들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나름의 인격과 인간적 면모를 부여하니 그들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을 수밖에요. 어머니께서는 선과 악을 분리하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박경리 선생은 스무 살에 아버님(김행도)과 결혼했습니다. 그 후 4년 만에 사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어쩌다 돌아가셨나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김후란 선생이 ‘문학의 집’에 글을 써달라고 해서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썼어요.
번번이 거절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란 글을 썼어요. 두 분은 아버지 스물다섯, 어머니 나이 스무 살에 결혼했지요.
아버지는 일본의 공학계통 전문학교에서 화공학을 공부했어요. 전공을 살려서 염전 부소장으로 일했어요. 아버지는 이념적으로 전도되진 않았지만,
이념 서적을 많이 읽으셨나 봐요. 어머니도 자연스레 그 책들을 다 읽게 됐겠죠.
어머니의 독서량은 엄청났어요. 다양한 세계관과 철학관이 ‘토지’라는 작품 밑에 깔려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어머니는 일본어만 알았고, 한글을 몰랐어요. 해방 후 아버지가 수도여전(지금의 세종대학교)에 입학시켜서
한글을 깨치게 된 거지요. 아버지께서 어머니 노트를 정리해 주기도 하셨대요. 어머니는 황해도 연안에서 교사를 했어요.
한국전쟁 때에는 우리가 흑석동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안오셔서 피란을 못 갔어요.
겨우 마지막 배를 타고 흑석동으로 돌아오셨는데 그땐 이미 인민군이 서울에 들이닥치고 난 다음이었지요.
아버지는 공산 치하에서 직장 일을 그대로 했는데,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끌려 가셨어요. 이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됐어요.
엄밀히 말하면 실종인 셈이지요. 어머니께선 그렇게 홀로 되셨어요. 아마 6·25가 터지지 않아서 행복하게 살았다면 어머니는 작가가 안 되었을 거예요.
원래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박금이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개명을 하셨나요?
그렇죠. 박경리는 필명이에요. 김동리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이지요. 그 당시 작가들 필명은 김동리 선생이 거의 다 지어준 거예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무엇입니까?
돌아가신 지 10년이 됐는데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에요.
타협을 몰랐던 점도 빼놓을 수 없지요.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힘든 길만 택해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나간 점도 존경스러워요. 어
머니께서는 남성 작가들의 실력을 뛰어넘으면서 질시를 많이 받기 시작했어요. 여류 작가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질투는 살인적이었죠.
제가 옆에서 그걸 다 봤어요. 어머니는 그걸 모두 견뎌냈어요.
소설이 잘 팔리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모든 것을 끊고 책상에만 앉아 계셨어요.
민주화운동을 하시던 김지하 선생 때문에 어머니께서 속을 많이 태우셨다는데, 김지하 선생은 장모님 생전에 효도를 많이 했나요?
김지하 시인이 날 고생시켰으니 어머니가 미워했지요. 어머니는 김지하 시인이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일을 낼 줄 몰랐어요.
성실한 가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군부정권의 핍박은 물론이고, 운동권으로부터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어요.
뒤치다꺼리는 제가 다 했어요. 박해와 중상모략 등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배신에,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 정탐까지……
어머니와 김지하 시인 두 사람의 개성은 달랐지만 두 분 모두 거인이었어요.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께서 도피 중인 김지하 선생을 박경리 선생에게 보내 ‘숨겨달라’고 했다면서요?
그 와중에 김 이사장님과 로맨스가 싹텄다고 들었습니다.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없었습니까?
그건 사실과 달라요. 난데없이 나타나 벼락같이 결혼했어요. 한 번은 무슨 속셈으로 나타났는지 모르겠는데 다른 작가들과 같이 집에 찾아왔어요.
세 사람이 찾아와서 어머니가 술을 대접했지요. 어머니는 똑똑한 김 시인이 인상적이었나 봐요. 또 한 번은 김 시인이 쓴 책을 가져온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유신 선포 후에 숨겨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어머니가 거절했어요. 저는 속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께서는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저더러 ‘배웅해주고 오라’고 하셨어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할머니께서 제 사주를 보고 오셔서는 ‘복이 많아 편안하게 잘 살 거야’ 말씀하신 게 생각났어요.
제 복을 조금 나눠주고 싶었는데 그게 방정맞은 생각이었어요.
박경리 선생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을 어떻게 견뎌내었습니까?
저와 김 시인이 무척 애를 먹였지요. 김 시인이 7년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운동권하고도 갈등이 있었고, 그런 저런 사정이 이어지면서 얼마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남들은 ‘아픔을 어머니가 가지고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생전에 저를 많이 야단쳤어요.
고생하는 저를 보는 게 힘드셨던 것 같아요.
딸이 불행하게 사는 게 불쌍해서 퍼부었던 거지요. 편안하고 좋은 꼴은 하나도 못 보고 돌아가셨어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김 이사장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이 내 가슴 속까지 전해오는 것 같았다. ‘인터뷰를 한답시고,
김 이사장의 아픈 상처를 들쑤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겨 일어나면서 질문을 하나 더 보탰다.
김 이사장님은 왜 글을 쓰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시를 잘 쓴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 글을 김동리 선생에게 가져가서 칭찬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영악해서 글 쓰는 게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전 그게 싫었어요.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글을 쓰게 마련이지요. 저는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작가가 된 것도 운명적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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